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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기획2] 선산장터⇀진평⇀해평⇀임은동으로 번진 3·1 독립만세 운동
3·1 운동의 중심지, 그 생생한 구미 독립 현장을 돌아보다
2024년 03월 01일 [K문화타임즈]


↑↑ [사진 출처=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


[K문화타임즈= 김영민 상임고문] 일제와 함께 구미 독립만세 운동을 폭압적으로 진압한 친일파들은 곳곳에 애국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살아왔고, 살고 있다. 일제에 앞장선 친일파에 대한 규명은 후세들에게 부여된 역사적인 과제이다.

구미 사람들은 3·1운동이 1919년 3월부터 약 3개월가량 끊이지 않고 이어졌으며, 200만 이상이 참여한 비폭력 운동이라는 사실, 일제의 폭력적 진압 과정에서 7,500여 명이 죽고 1만 5천여 명이 다쳤으며, 5만 명 이상이 검거된 거족적 항일투쟁이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일지 못하고 있다. 2005년 발간된 구미시지에도 정확한 내용이 나타나지 않아 안타깝다.

더구나 최근 일제 강점기의 치욕을 엉뚱, 괴상망측한 논리로 제2의 매국노가 나타나는 일이 벌어지는 현실에서 우리 지역에서 있었던 일을 밝혀 진실을 거짓으로 만들려고 획책하는 무리에게 분명하게 이를 밝히고자 한다.

구미·선산 지역에서의 삼일운동은 지금 구미 시내 두 지역과 선산 지역 두 군데에서 각각 전개됐다. 물론 산발적인 시위의 형식이다. 관련 기록이 많지 않아서 <구미향토문화대전>과 3·1운동으로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은 이들의 공훈록(국가보훈처)을 참고해 이를 재구성했다. [편집자]

↑↑ [사진 출처=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


◇진평동 독립 만세 운동
네 차례에 걸쳐 진행

구미 지역에서의 만세 운동은 구미시 진평동(당시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에서 첫 불을 지폈다. 영남 3·1운동의 효시(嚆矢)인 대구 만세 운동이 일어나기 바로 전날이었다. 대구만세 운동은 3월 8일 서문외(西門外 :서문시장) 장날에 계성학교·대구 고등보통학교·신명여학교·성경학교 학생들이 주도해 전개된다.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이 등사판으로 인쇄한 독립선언서 20장을 감추고 인동교회 목사 이상백(1886~1965)을 찾아왔다. 훗날 이영식은 서문교회 목사를 거쳐 대구대학교를 설립했다.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됐다.

이상백은 이웃의 이내성(1893~1927)과 함께 이영식의 제안을 받고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상백은 같은 동네의 박명언·이영래·임점석·임용섭·권영해·허도언 등과 상의해 거사 날을 3월 12일로 잡았다. 이상백과 임용섭은 붓으로 독립선언서를 써서 준비하고, 3월 11일에는 이상백의 집에서 이영식·이영래·임점석 등이 당일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2일, 박명언과 허도언은 집집이 방문해 만세 운동 계획을 알리고, 독립선언서를 마을 곳곳에 붙였다. 이날 밤 8시경 마을 사람 200여 명이 뒷산에 모였다.

이상백과 이영식은 교대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조국이 멀지 않은 장래에 독립될 것이라며, 독립을 위해서 만세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연설한 후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했다. 밤이 늦도록 전개된 시위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본 경찰은 이상백을 비롯한 주동자 8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다음 날, 오후 4시께 같은 장소에서 마을 사람 약 20명이 다시 만세를 불렀고, 이날 저녁 9시에 약 30명이 같은 자리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다음 날인 3월14일 오후 9시께에도 마을 사람들은 같은 장소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사흘 동안 4차례에 걸쳐 만세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일본 경찰은 주동자 33명을 체포했고 이 중 25명을 재판에 넘겼다.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이상백(1990 애족장)은 징역 2년, 이내성(1990 애국장)은 징역 1년 6월, 박봉술(1990 애족장)·이영래·임점석·임용섭(대통령 표창)은 각각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또, 박명언(1990 애족장)·권영해(대구·당시 진평교회 목사, 1990 애족장)는 징역 10개월, 장영직·이윤약·서기옥·장상건·임삼선·박근술·서천수·박순석·김성윤·박삼봉·권경보·임동석·김도길·장준현(이상 대통령 표창)·박금출·장주단·김삼주 등은 각각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들은 모두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상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짠 이내성은 복역 후 1926년 장진홍(1962 독립장) 선생과 함께 직접적인 대일투쟁을 결의하고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거사 준비에 협력했다. 그는 거사 이후 일경의 추적을 받고 피신하던 중 1927년 8월 구미에서 자결 순국했다.

◇선산장터 독립 만세운동
선산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3월 13일 만세 계획이 있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4월 12일 권오환(權五煥)을 중심으로 선산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였다.
선산 공립보통학교 졸업생인 이유암(李有岩)은 서울과 대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호응해 선산에서도 거사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3월 9일 진용섭(陳瑢燮)·한팔암(韓八岩)·김광수(金光洙)와 만나 거의를 모의하고 12일 밤 선산공립보통학교 기숙사로 찾아가 학생들에게 만세시위에 동참해 달라고 요청헸다.

하지만 다음날 교장의 강압으로 학생들이 불참하면서 시위는 실패로 끝났다. 시위계획이 실패로 끝나자, 주동자인 이유암과 학생 대표인 박완동(朴完同) 등은 일경에 검거돼 재판에 회부됐다. 이들은 4월 30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으로부터 각각 징역 10개월을 언도받고 대구형무소에 투옥됐다.

이후 선산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1차 모의가 실패로 끝나자 선산군 도개면 도개리에 사는 권오환은 이원길(李元吉)·박희목(朴喜穆)·전용신(田容信)·김의경(金義景) 등과 상의해 4월 12일 선산읍 장날 장터에서 다시 만세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했다. 12일 이들은 선산장터에서 오후 5시경 권오환의 선창으로 장터에 있던 50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만세를 연호했다.

그러나 4월 12일 밤 일경은 가택을 수색해 주모자 격인 권오환·이원길·김의경·박희목·전용신 5명을 검거했다. 이들은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청으로부터 권오환은 징역 1년 6개월, 그 외에도 시위 참가자 중 일부는 징역 10개월을 언도받아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구미의 만세사건에서 첫 봉기를 촉발한 것은 학생층이었으나 3월 중·하순으로 가면서 차츰 군내의 면(面)으로 확대돼 나갔다. 선산장터 독립만세 운동을 통해 지방의 지식인과 장터 상인을 중심으로 항일 저항 운동이 저변으로 번져나간 것이다.

◇해평 독립 만세 운동
주재소로 행진, 격렬하게 충돌

해평의 독립 만세 운동은 구미·선산에서 펼쳐진 만세 운동 가운데 가장 격렬한 형태로 전개됐다.
진평동과 임은동의 만세운동은 마을 뒷산을 무대로 펼쳐졌지만, 해평에서는 시위대가 일제 식민지통치의 물리적 폭압 기구인 경찰 주재소로 행진해 갔기 때문인 듯하다.
해평면 산양동 교회의 전도사 최재화(1892~1962)는 이웃 인동면의 기독교도 박진오와 함께 만세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4월 3일 밤 11시 30분께 최재화는 산양동·송곡동·금호동에서 나온 70여 명의 시위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해평의 경찰 주재소로 행진했다.

일본 경찰이 무력을 행사하자 최재화는 시위군중과 함께 투석으로 맞섰다. 시위대는 70여 명에 불과했지만, 기세에 놀란 일본 경찰은 공포탄을 쏘아대며 선산경찰서와 군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선산에서 경찰부장 이하 6명, 대구의 일본 헌병이 3명, 상주의 일본군 수비대 11명이 달려왔지만, 군중들은 해산한 뒤였다.

이튿날, 일본 경찰은 만세 운동에 참여한 동민들 가운데 55명을 체포했다. 최재화(1990 애족장)는 피신했으나 궐석재판으로 1차에서 징역 3년, 2차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고, 다른 24명은 각각 태형 80대를 받았다.

최재화는 이후에도 적극적인 독립운동을 벌였다. 만세 운동 후 피신한 그는 5월, 대담하게 경상북도 내의 조선인 관공리(官公吏)에게 사직을 권고하는 인쇄물을 만들어 배포하고, 대구 시내의 조선인이 경영하는 상점을 폐점할 것을 요구하는 격문을 배포하기도 했다. 6월에는 애국청년을 모집해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게 하고, 또한 청년 지식인 여러 명을 상하이 임시정부에 파견해 독립운동에 참여시키는 등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1920년 7월, 그는 인근 상주에서 체포되었지만, 대구로 호송되는 중에 탈주했다.

일제는 궐석재판에서 중형을 선고한 그를 체포하기에 혈안이 되었으나 최재화는 7월, 일본을 거쳐 중국 베이징으로 탈출했다. 그는 은사 김규식의 천거로 의열단에 가입해 활동했고, 김구 휘하에서 베이징의 임정 자금 모금책을 맡기도 했으며 임시정부 최고정치 회의에 최연소자(27세)로 참가하기도 했다.

1926년 그는 화북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돼 국내 여러 교회의 담임을 맡아 사역했다. 그는 1955년 개교한 계명기독대학(현재 계명대학교)의 설립자 세 사람 중 한 사람이다. 그의 고향인 산양리 마을 앞에는 1963년 ‘애국지사 백은 최재화 목사 기념비’가 세워졌다.

◇임은동 독립 만세 운동
임은동은 왕산(1855~1908) 선생의 항일의 기풍이 강했다. 지방 유지인 강용준·유시동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모의하고, 임은동 뒷산에서 밤늦도록 ‘독립 만세’를 외쳤다. 4월 9일 이 소식을 들은 순사부장 이하 4명, 일군 수비병 5명, 인동 주재 일군 헌병 2명이 임은동으로 왔으나 동민들은 마을 뒷산으로 은신해 의거에 참여한 군중을 검거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4월 15일 다시 일본의 군경이 임은동에 갑자기 들어와 만세 주모자들을 모두 검거했다. 만세 주모자들의 판결문이 없어 구체적으로 전개된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구미지역의 만세사건과 관련 첫 봉기를 촉발한 것은 학생층이었으나 3월 중·하순으로 가면서 차츰 군내의 면(面)으로 확대돼 나갔다. 구체적으로는 선산장터 독립만세운동을 통해 지방의 지식인과 장터 상인을 중심으로 항일 저항의 저변이 확대된 점이 다른 지역과의 운동의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만세운동에 앞장선 선각자들 중 해평의 최재화 목사는 대구 계명대학의 설립자 3인 중 1인이었고, 이영식(구미 만세운동의 첫 시발지, 진평동)은 대구대학을 세운 교육자였다. 학문을 통해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원대한 정치이념을 실현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서일주 기자 goguma1841@naver.com 기자  114dd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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