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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박희광 선생 54주기] 해방 조국은 야속했다..풍상(風霜)의 삶 살다 간 구미 봉곡 출신 독립투사
2024년 1월 22일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54주기 추모식
20여 년간 옥살이, 박선생을 맞은 조국 대한민국은?
2024년 01월 22일 [K문화타임즈]

→1924년 7월 22일 일본 총영사관 폭탄 투척
→이등방문의 수양녀, 일진회 회장 이용구 암살 시도
→1심 사형 선고, 2심 무기징역 중국 뤼순 형무소 20여 년간 복역
→1944년 출소 후 귀향
→1945년 8월 15일 백범 김구에게 경과보고
→백범, 비서 통해 박 선생에게 위로금 전달
→부인 떠난 고독한 삶, 5남매와 함께 한 풍상의 세월, 해방 조국이 박 선생에게 안긴 것은 가난
→1973년 3월 1일 박정희 대통령 친필 휘호• 하사금 유족에게 전달
→박휘광 선생 생가 복원, 시비 미확보로 중단


↑↑ 박희광 선생 54주기 추모식이 22일 금오산 박희광 선생 동상 앞에서 김장호 구미시장, 구자근·김영식 국회의원, 안주찬 구미시의회 의장, 보훈 단체장, 유족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엄수됐다.
[사진 제공 = 구미시]

[발행인 김경홍]
식민지 조국의 해방을 위해 청춘을 바친 구미시 봉곡동 출신의 박희광 선생,‘해방 조국’이 그의 품에 안긴 것은 가난이었다.
 
↑↑ 박희광 선생.
[사진 제공 =유족회]

5남매를 남겨둔 채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자, 박 선생은 옥중에서 익힌 양복 재봉 기술에 의지해 풍상과 맞서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20여 년간의 옥고 치른 박휘광 선생
구미시 봉곡동에서 태어난 박희광 선생은 1908년 8세 때 부친을 따라 만주에서 삶의 터전을 일궜다. 1916년 3월 청원현 남성자 학교를 졸업하고 18세가 되자, 일제를 토벌하기 위해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지휘하는 독립 군사단체인 통의부 5중대에 자진 입대했다. 그곳에서 6개월간의 군사 훈련을 마친 후 특공대원으로 편입해 항일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박 선생은 특히 김명봉, 김광추, 김병현과 함께 일본군 공격 작전에 참가했다. 특공대원들은 가장 먼저 남만주 일대에서 악명 높던 일제의 앞잡이 최정규와 일제의 첩자 정갑주를 겨냥했다. 이들은 1924년 6월 1일 정갑주와 가족을 몰살한 데 이어 1924년 6월 7일에는 최정규의 집안을 초토화시켰다. 친일 앞잡이에 대한 철저한 응징이었다.

항일 독립 투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1924년 7월 22일에는 봉천의 일본 총영사관에 들어가 폭탄을 투척했으나 실패했다. 앞서 박 선생 등은 이등방문의 수양녀를 대련에서, 일진회 회장 이용구를 봉천에서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박 선생 등은 일본 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한 1924년 7월 22일 저녁, 일본의 고급 요정인 금정관에 들러 군자금 3백 원을 징수해 나오다가 일경에 발각돼 총격전을 벌였다. 이 와중에 김광추 소대장은 순국했으며, 박 선생은 권총으로 응사하면서 맞섰으나 결국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이후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투사다운 기백을 보인 박 선생은 관동청 지방법원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상고해 고등법원 2심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아 중국 뤼순 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출옥한 것은 20여 년간의 옥고를 치른 1943년 3월 23일, 박 선생의 나이 43세였다.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다 투옥돼 감옥에서 청춘을 보낸 박 선생은 출옥 후에도 뜻을 굽히지 않고 대련에서 동지들과 함께 중경으로 이동한 후 임시정부를 찾아 독립 투쟁을 하려고 했으나 길이 막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44년 고향 구미로 귀향
1944년 귀향해 그해 4월 20일 결혼한 박 선생은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임시 정부 요원들이 귀국하자, 백범 김구를 만나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했다. 당시 김구는 비서를 시켜 위로금을 전달하기도 했다.

박 선생의 생활은 궁핍했다. 옥중에서 익힌 양복 재봉 기술에 의지해 어렵게 살다가 5남매를 남겨둔 채 부인마저 세상을 떠나자, 풍상과 맞서는 어려운 시절을 보내야만 했으니 말이다.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 받은 것은 광복 후 23년 만인 1968년 3월 1일이었다. 하지만 기쁨도 오래가지 않았다. 박 선생은 7년 후인 1970년 1월 22일 70세를 일기로 서울 보훈 병원에서 한 많은 생을 마쳤고, 서울 동작동 국립 현충원에 부인 류 씨와 함께 영면에 들었다.

박 선생이 세상을 하직한 2년 후인 1972년 3월에는 공적을 기리는 동상(기념비) 건립 추진위원회가 발족됐다. 또 1973년 3월 1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친필 휘호와 하사금을 받으면서 동상 건립이 탄력을 받았다.
하지만 여의치 못한 자금 사정으로 결국 1984년 3월 1일 당초 흉상을 동상으로 재주조 변경해 건립키로 했고, 광복절인 1984년 8월 15일 지금의 백운교 옆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이어 1984년 9월 정부로부터 동상 건립 심의 84-1호로 지정받아 1984년 12월 28일 제막식을 가졌다.

▲시비 미확보로 생가 복원, 추모관, 겨레의 동산 조성 불발
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기념사업회(명예 회장 이수성, 사무처장•유족 대표 박정용)가 추진한‘애국지사 박희광 선생 고향 옛터 생가 복원과 추모관 및 겨레(애국)의 동산 조성 사업’은 시비 미확보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지금도 미완의 아픔으로 남아있다.

생가를 고전적 한옥 황토집 1동과 팔각정 1동으로 복원하고, 유물 전시실을 포함한 추모관 1동과 겨레(애국) 동산 등이 들어서게 되는 사업에 필요한 예산은 21억 4천5백만 원이었다.

사업회는 이를 위해 친지와 유족이 이미 확보한 4천5백만 원에다 추가로 21억 원을 조성하기 위해 국비 7억 원, 시비 7억 원, 도비 7억 원을 확보한다는 계획이었다. 앞서 밀양박씨 경주공파 종중은 2천58평방미터(622평• 18억 6천6백만 원 상당)의 대지를 확보했다. 하지만 사업회가 국비를 확보했지만 시비 미확보로 사업은 중단됐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경홍 기자 siin0122@hanmail.net 기자  114dd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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