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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문화타임즈의‘우리의 얼 되찾기 운동’] 구미 지역 동네의 옛 이름을 찾아 (8) 진평동
김영민 전 구미•대구 YMCA 사무총장 / k문화타임즈 공동 고문 겸 논설위원장
2022년 10월 29일 [K문화타임즈]


구미에서 처음 연속 4차례나 3.1만세운동
신라 진평왕이 사냥 왔다가 머물렀을 때 왕의 이름을 따온 데서 유래


늘 비판과 격려를 해 주시는 네티즌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얼 되찾기의 가치관을 지향하는 k문화타임즈가‘우리의 얼 되찾기의 운동’에 나섭니다.
그 일환으로 김영민 필진이‘구미 지역 동네의 옛 이름을 찾아서’, 송기남 필진이 우리나라 항일 운동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 제주항일 운동사’를 각각 연재합니다. [편집자]


 



김영민 k문화타임즈 고문 겸 논설위원장
대표적인 시민운동가입니다.
구미 YMCA, 대구 YMCA 사무총장을 역임했습니다.
잊혀진 구미의 지명 살리기와 관련한 칼럼을 연재합니다.




◇송기남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
제주 4•3 민주 항쟁과 제주 생태(자연, 인문) 분야에서 오랜 활동을 해 오신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시민사회 활동가입니다.
제주항일 운동 칼럼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구미 지역 동네의 옛 이름을 찾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구미를 느끼고 살아왔는지 각 동의 이름을 중심으로 그 유래와 내용을 통해서 살펴본다.
<필자>


◇명칭 유래/진평동 眞坪
구미에서 처음 연속 4차례나 3.1만세운동
자연부락 지명유래

*진평: 낙동강 변에 옥토가 있어 붙여진 이름, 또는 신라 진평왕이 사냥 왔다가 머물렀을 때 왕의 이름을 따 진평이라 하였다고도 전한다.
*양원: 마을 앞에 흐르던 이계천(飴溪川) 변에 수양버들이 늘어져 경관이 좋을 뿐 아니라 물이 맑고 마르지 않는 샘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
*역촌: 조선시대에 김천찰방 관할의 양원역이 있던 마을.
*도세: 서울 가는 길 서쪽에 있는 마을, 또는 서울 가는 길목인 이곳에서 주막을 하던 주인 이름이 박도서(朴道西)였기에 도세라 불렀다고 함


형성
원래 인동군(仁同郡) 지역,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칠곡군 인동면 진평동·역리·구제동을 병합하여 진평리가 되었고, 1977년 선산군 구미읍과 칠곡군 인동면을 관할하는 경상북도 구미지구 출장소에 속하였다. 1978년 구미지구출장소가 구미시로 승격하여 구미시 진평동이 되면서 시미동·임수동과 함께 행정동인 진미동 관할이 되었다.


진평동(眞坪) 3.1 만세운동
의미: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점, 구미 지역에서의 만세 운동의 첫 불을 지핀 곳

 
↑↑ 이양식

진행내용
*1919년 3월 7일, 대구 계성학교 학생 이영식(대구대학교 설립자, 목사) 이 등사판으로 인쇄한 독립선언서 20장을 인동교회 목사 이상백(1886~1965)을 찾아 바로 이내성(1893~1927)과 함께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상백은 박명언·이영래·임점석·임용섭·권영해·허도언과 거사일을 3월 12일로 잡고, 이상백과 임용섭은 붓으로 독립선언서를 써서 준비하고, 3월 11일에는 이상백의 집에서 이영식·이영래·임점석 등이 당일 사용할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12일, 박명언과 허도언은 집집마다 방문하여 만세 운동 계획을 알리고, 독립선언서를 마을 곳곳에 붙였다. 이날 밤 8시경 마을 사람 200여 명이 뒷산에 모였다
*이상백과 이영식은 교대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조국이 멀지 않은 장래에 독립될 것이라며, 독립을 위해서 만세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연설한 뒤, 대한독립 만세를 선창했다

*밤이 늦도록 전개된 시위 소식을 듣고 출동한 일본 경찰은 이 상백을 비롯한 주동자 8명을 체포했다
*다음 날, 오후 4시께 같은 장소에서 마을 사람 약 20명이 다시 만세를 불렀고, 이날 저녁 9시에 약 30명이 같은 자리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3월 14일 오후 9시경 마을 사람들은 같은 장소에 모여 사흘 동안 4차례에 걸쳐 만세 운동이 전개된 것이다.
*일본 경찰은 주동자 33명을 체포했고 이 중 25명을 재판에 넘겼다.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으로부터 이상백 징역 2년, 이내성은 징역 1년 6월, 박봉술, 이영래·임점석·임용섭은 각각 징역 1년을 박명언 등은 10개월, 장영직 등은 6개월을 선고받고 대구 형무소에서 옥고 치르게 되었다
*이상백과 함께 거사 계획을 짠 이내성은 복역 후, 1926년 장진홍 선생과 함께 직접적인 대일투쟁을 결의하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거사 준비에 협력했다. 그 후 일경의 추적을 받고 피신하던 중, 1927년 8월 구미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3.1만세운동의 연결을 위한 운동가들
권경보 權景甫: 거사일인 3월 12일 밤 8시 30분경 동민 200여 명과 함께 마을 뒷산에서 만세시위를 하였다. 만세운동은 일본 관헌의 탄압으로 주동 인물 일부가 체포되면서 해산되었지만, 3월 13일 오후 4시경 같은 장소에서 약 20명이 만세 시위를 하였다.
또한 밤 9시에 약 30명이 다시 같은 자리인 뒷산에 모여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권경보는 3월 14일 오후 9시경에 지역 주민 약 40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 운동을 전개하여 독립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였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으며,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권영해 權永海 : 3월 12일 이상백·이내성 등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동민들에게 나누어주고, 붓으로 쓴 독립선언서도 마을 곳곳에 붙였다. 오후 8시경 마을 뒷산에서 동민 약 200명을 이끌고 독립 만세를 외치다가 해산하였으며, 다음날인 3월 13일 오후 4시경 같은 장소에서 약 20명을 규합하여 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또한 밤 9시에 약 30명을 규합하여 마을 뒷산에서 밤늦게까지 독립 만세를 외쳤으며, 이튿날인 3월 14일 저녁 9시경에 동민 40여 명과 함께 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같은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름

김도길 金道吉: 박봉술(朴鳳述) 등과 만세 운동을 다시 일으키기로 뜻을 모으고 거사일을 3월 14일로 정하였다.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한 후 3월 14일 오후 9시 마을 뒷산 기슭에서 다수의 군중을 규합하고 독립 만세를 선창하였다. 김도길은 만세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징역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김성윤 金性允: 3월 13일 오후 4시경 같은 장소에서 20여 명을 주동하여 시위를 일으켰으며, 밤 9시에 30여 명을 같은 자리인 뒷산에 모이게 하여 독립 만세를 외쳤다. 또한 3월 14일 오후 9시경에 동민 40여 명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치며 만세 운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징역 6월 형을 선고 옥고 치름

이내성李乃成 ( 별칭 이만우) 의병·독립운동가(1892년 4월 l일, 진평동 543번지 출생) 17세 때 계성학교를 중퇴하고 동향 동지인 장진홍(張鎭弘)과 함께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고 제대 후 광복회(光復會)에 가입하여 독립 투쟁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매부 이영식(李永植) 목사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필사 또는 등사하여 배포하는 한편, 태극기를 만들어 3월 12일 인동(仁同) 장날을 이용하여 오후 8시 진평동 주민 200여 명을 집결,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선도하였다. 다음 장날인 3월 17일 다시

같은 곳에서 만세 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1919년 4월 2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l년 6개월의 형을 받아 옥고를 치른 뒤 출옥하였다. 이후 장진홍과 함께 왜관 지역의 공공기관을 파괴하기로 결심하고 폭탄을 제조하였다. 1927년 5월 28일 11시 시경 꿀로 가장한 상자 4개를 조선은행 지점장, 식산은행지점장, 경찰서장, 도지사 등에게 전달하도록 박노선(朴魯宣)에게 의뢰하였는데 조선은행 지점장에게만 전해지고 나머지 3개는 운반 도중 실수로 노상에 떨어져 연쇄 폭발을 일으켜 일본 경찰 4명, 은행원 1명, 통행인 1명이 중상을 입고 유리창 70여 장이 파괴되었다.

 

 

↑↑ :이내성 수감 기록 구미시 독립운동사 전시회> 이후에도 요인 폭살과 시설 파괴를 기도하였으나 일본 경찰의 수색이 심해지자 추격을 피하여 은신하던 중 1927년 8월 구미에서 자결 순국하였다. 구미시 시미동에 묘비가 있다

김미자 기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114dd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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