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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 43주기 기획] 박정희 대통령 ‘가만있는 이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선심은 없다’
1969년 구미공단 선정 앞두고 1967-68년 구미 방문한 ‘애향의 박정희 대통령’
역대 대통령은 구미공단에 어떤 선물 주었나
2022년 10월 26일 [K문화타임즈]

[K문화타임즈 = 김경홍 기자]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로는 비단같이 굉장한 것 같이 떠드는데, 행동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내 고장부터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애향심이라는 것이, 즉 애국심입니다. 내 고장을 아끼는 것이 무엇이냐... 남한에서 다른 지방의 어디보다도 가장 나무가 없는 데가 바로 우리 고장 선산입니다. 또 김천, 상주, 칠곡 일대가 가장 나무가 적습니다 ”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의 첫 공식 일정은 구미(선산)방문이었다. 그해 3월 30일 일선교 준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산림녹화를 강조하면서 실천하는 애향심과 애국심을 강조했다.
이어 구미국가 공단 선정을 1년 앞둔 1968년 11월 11일, 선산 농산물 가공 공장 (원평동 소재) 준공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은 치사를 통해 “사업의 타당성, 미래 국가 경제에 대한 기여도에 부합할 수 있는 타당한 사업 계획안을 만들어야 하고, 이런 연후에 연고를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이면에는 “대통령의 고향이기 때문에 뒷짐을 지고 있어도 먹이를 물어다 주겠지 하는 안이한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구미를 방문해 정주여건 개선을 위한 자율적인 노력(산림녹화)과 지도자와 주민의 개척주의 정신(프로티어 쉽)을 유난히 강조해 온 이면에는 향후 산업화의 전진기지로 선정될 구미공단을 장차 구미 스스로가 성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강한 주문을 내포하고 있었다는 게 그 시대를 함께해 온 이들이 전언이다.

6대 대통령에 취임한 1967년 직후, 박 대통령은 전자산업이 일본의 경제 성장을 견인한 데 착안해 수출을 주도한 섬유산업과 미래전략 산업인 전자산업을 함께 육성하겠다는 전략안을 수립했고, 지역 선정 절차에 착수했다. 결국 섬유도시 대구에 인접해 있고, 낙동강으로부터 채수할 수 있는 풍부한 공업용수를 호조건으로 한 구미가 결국 국가공단으로 선정됐다. 이미 박 대통령은 구미 지도자들에게  풍부한 낙동강물은 구미공단의 생명수이기 때문에 잘 관리해야 한다는 주문을 하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지켜본 관계자들은 고향인 구미가 선정된 데 대해 겸연쩍어했다는 표현을 쓰고 있지만 박 대통령은 제6대 대통령에 취임한 1967년부터 산업화의 전진기지로 구미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구미를 방문할 때마다 유난히 산림녹화 등 기초적인 정주여건 개선을 위해 지도자와 주민들이 솔선수범하고, ‘노력하지 않아도 먹이를 물어다 주겠지 하는’ 연고주의가 결국 지역발전을 저해한다는 경각심을 누차 강조해 온 것도 같은 맥락이다.

결국 1969년 국가산업단지 지정과 함께 그해 9월부터 조성에 들어간 구미공단이 윤곽을 드러내면서 작은 읍소재지에 불과했던 구미읍(지금의 구미시)으로 전국 팔도의 생산인력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경북 도내에서 인구 1, 2위를 마크하던 26만의 상주시가 10만 중반대로 내려앉고, 20만의 김천시 인구가 10만 중반대로 내려앉을 만큼 구미국가 공단은 이들 지역 청년들에겐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이상세계“로 각인됐다.

70년대 중반으로 들어서면서 금성사(현 LG전자)가 들어오자, 구미공단은 TV와 반도체 등 전자제품과 섬유화학 제품을 생산하면서 산업화의 전진기지로 발돋움하기 시작했고, 1973년 자체 생산 제품 첫 수출로 탄력을 받은 구미공단은 1975년 수출 1억 달러 시대를 열면서 명실상부한 산업화의 전진기지로서 한강에 이어 낙동강의 기적을 이룬 곳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어 1988년 삼성전자가 국내 최초의 휴대전화 SH-100을 개발하고 ‘애니콜 신화’가 시작되면서 구미는 한국의 실리콘밸리로 발돋움 했다.

이러한 저력에 힘입어 2004년 마크한 구미의 수출액 274억 달러는 전국 수출액의 10.8%, 전국 흑자 규모의 80% 이상을 차지하면서 역사는 구미공단을 낙동강의 기적을 써 내린 메카로 기록했다.

70~80년대 섬유·전자 산업에서 출발해 90년대 전자·가전, 2000년대 모바일·디스플레이, 2010년 이후 차세대 모바일·의료기기·자동차부품·탄소섬유 등 시대에 따라 주력산업을 변화시켜온 구미공단은 ‘구미 경제가 곧 대한민국의 경제’라는 수식어를 만들었다. 인구 2만 명 미만의 조그만 시골 읍이 인구 43만 명, 최대 수출기록 320억 달러의 글로벌 전자산업도시로 발돋움하는데 기인한 상징적 표현이었다.

 


↑↑ 산업 현장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 [사진출처= 박정희 대통령 기념사업회]


◇ 산업화의 전진기지 구미, 급속하게 변화되는 정치 민심
1963년 10월 15일 실시한 제5대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는 육군 참모총장 출신의 신흥당 장이석(60세) , 국방장관 출신의 자유민주당 송요찬(45세), 국가최고 재건회의 의장 출신의 민주공화당 박정희(46세), 건설신문사 사장 출신의 추풍회 오재영(44세), 대통령 출신의 윤보선(66세), 국무총리 서리 출신의 국민의당 허정(67세), 국무총리 출신의 정민회 변영태(70세) 등 기라성 같은 후보들이 나섰다.
선거 결과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후보가 득표한 454만 표보다 16만 표가 많은 470만 표를 득표하면서 진땀을 흘린 끝에 당선됐다.

당시 경북도 선거에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몰표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경북도(대구 포함) 165만 표 중 박정희 대통령이 83만 7천 표를 얻었고, 윤보선 후보 역시 54만 3천 표의 득표력을 과시했기 때문이었다.

이어 1967년 5월 3일 직선제로 실시된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은 윤보선 전 대통령과 재격돌해야 했지만 표 차는 5대에 비해 상당히 벌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선거 결과 전체 투표자 1천 164만 표 중 민주공화당 후보인 박정희 대통령은 568만 표를 득표해 452만 표를 얻은 신민당 윤보선 후보를 1백1십여만 표 차로 눌렀으니 말이다. 5대 선거에서 나타난 표차인 16만 표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들 정도였다.

특이한 점은 6대 대선부터 박정희 대통령의 경북득표율이 돋보이기 시작한 데다 구미에서의 득표율이 80%에 육박했다는 점이다. 반면 전남지역에서도 박정희 대통령이 윤보선 후보를 앞서는 특이상황을 낳았으니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당시 경북(대구 포함)지역 선거에서는 총투표자 178만 표 중 박정희 대통령이 1백만 8만 표를 얻으면서 60%대의 득표율을 보인 반면 윤보선 전 대통령은 44만 7천 표로 24%를 얻는 데 그쳤다.

선산군(지금의 구미시)은 총 4만 9천 명의 투표자 중 박정희 대통령에게 3만 9천 표를 몰아주었다. 이는 80%대에 근접한 79%의 득표율이었다. 반면 차점자인 윤보선은 4천6백 표로 9%의 득표율을 얻는 데 그쳤다.

구미공단 조성에 대한 구상이 수면 위로 움직이기 시작한 1967년 당시부터 박정희 대통령에 대해 구미(선산)를 비롯한 경북의 표심이 강한 결집양상을 보이면서 보수정서가 급속하게 저변을 확대해 나간 것이다.

민주 우선의 진보 정서보다 ‘먹고사는 문제를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보수 정서가 ‘보릿고개’를 극복하지 않는 한 미래는 없다는 박 대통령의 국정 운영방침에 동의하고 나섰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박정희 대통령 ‘누군가가 먹이를 물어다 줄 것’이라는 환상 버려야
지금의 구미 경제는 급격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대기업이 수도권과 해외로 이전하면서 구미공단은 위축되고 있고, 단순 하청을 통해 생존해 온 수많은 중소기업은 물량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인가.

1968년 11월 11일 선산 농산물 가공 공장 준공식에서 박 대통령의 강조한 치사의 내용이 생생한 이유가 있다.
“지방과 지방, 국가와 국가 간의 생존경쟁을 위한 경쟁이 치열한 현 상황에서 지연, 학연, 혈연이라는 정에 이끌려 ‘가만있는 이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선심’은 있을 수 없다. 기대해서도 안 된다”

노력하지 않는 자에게 누군가가 먹이를 물어다 줄 것이라는 발상을 한다면 미래가 없을 것이라는 50여년 전 박 대통령의 우려는 현실이 됐다. 구미를 꾸려온  리더 그룹들이 ‘진정한 박정희의 정신’을 계승했더라면 침울한 오늘의 구미로 추락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은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은 구미공단에 어떤 선물 주었나
구미공단을 태생시킨 박정희 대통령 이후 바통을 이어받은 역대 대통령 중 최규화, 전두환, 노태우를 제외한 이후의 대통령들은 구미공단에 많은 애정을 쏟았다. 진영의 논리보다 경제의 논리를 우선시 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
낙동강의 기적을 이룬 구미공단 선정 및 조성

▪김대중 대통령
박세직 의원의 정치력 발휘가 진가를 발휘했다. 자민련에 입당해 4공단 조성에 정치적 명운을 걸다시피 했던 박 의원은 1996년 대구에 내려와 있던 김대중 대통령을 구미 4공단 착공식에 참석시키는 기지를 발휘했다.
4공단 착공식 당일 김대중 대통령은 대구 행사를 마치고 귀경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박 의원은 대통령 비서진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종필 총재의 핫라인을 활용, 예정에 없던 대통령의 4공단 착공식 참석이라는 역사를 쓰게 했다. 이후 4공단 조성은 탄력을 받았다.

▪노무현 대통령
2004년 노무현 대통령은 구미에서 열린 200억 불 수출 기념행사에 참석했다.
당시 노 대통령에게 시민들은 구미 근로자들의 최대 숙원사업 중의 하나였던 근로자 복지시설을 건립토록 해 달라고 건의했고, 결국 현실이 됐다.

▪이명박 대통령
임기 중 네 번에 걸쳐 구미를 방문했다. 남유진 시장의 노력이 주효했다.
통상 4~5년이 걸리는 국가공단 승인 기한을 앞당기기 위해 남 시장이 건의한 특별법 제정이 구체화되면서 구미 5공단은 신청 후 6개월 만에 승인됐다.
5공단에 외국인 투자지역 지정이 가능했던 것도 김관용 지사의 건의를 이 대통령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박근혜 대통령
김관용 지사와 남유진 시장의 노력에 힘입어 박근혜 대통령은 5단지에 탄소클러스터 조성을 확정토록 했다.
2016년 10월 도레이 첨단소재 기공식에 참석한 데 이어 새마을 중앙시장에서 가진 상인과의 간담회에서 KTX 구미역 정차 건의를 받은 박 대통령은 “기업하기 좋은 도시 조성에는 당연히 접근성이 중요하다“면서 배석한 경제수석에게 적극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사실상 당장에 사업착수를 하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구미방문을 마치고 상경한 그날 오후 박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에 휘말렸다. 구미지역 최대의 현안 중 하나인 KTX 구미역 정차는 지금까지 미결과제로 남아 있다.

▪문재인 대통령
구미형 일자리 협약식을 통해 엘지 화학의 5공단 입주를 가시화시켰으며, 구미공단을 스마트 산단으로 지정했다.

김경홍 기자 siin0122@hanmail.net 기자  114dd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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