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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K문화타임즈‘우리의 얼 되찾기’2] 구미는 일제 강점기의 주요 사찰 대상지, 그 중심에 장진홍•박상희 선생과 또 다른 인물 원평동 김정술 선생
일제강점기 구미는 독립운동의 중심지
금오산은 사제 폭탄 제조지로 알려져
폭탄 테러 발생할 때마다 구미는 사찰 대상지
곳곳이 벌집 쑤셔놓은 듯
2022년 09월 06일 [K문화타임즈]

▲비타협적 민족자결주의 이념 표방, 신간회의 중심인물은 구미 출신 장진홍, 박상희, 김정술 선생
▲조선일보 1927년 11월 14일 자 보도 “구미에서는 조금만 수상한 사람이 지나가면 즉시 불문곡직하고 검속함으로 인하여 현재 구미 사람들은 매우 공포에 싸여 있는 모양이더라"



↑↑ 구미 원평 출신 독립투자 김정술 선생 [ 사진 제공 = 둘째 아들 김구식 선생 ]


[K문화타임즈 = 김경홍 기자] 
1920년대의 일제 강점기에 박상희, 장진홍 선생과 함께 신간회 조직의 또 다른 중심인물이었던 구미 출신 김정술 선생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져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하고 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비타협적 민족자결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범민주주의 세력이 결집해서 만든 독립운동단체로서 국내를 비롯한 해외지부에 4만여 회원을 가진 거대 조직이었다. 당시 대구고보(현 경북중고교) 재학생 신분이었던 구미 원평동 출신의 김정술 선생은 신간회의 중심인물인 구미 인동 장진홍 선생을 지원하는 역할의 중심에 섰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 선생과 김 선생은 일제 강점기 경찰 정보망을 피해 가며 금오산 성안마을에서 제조한 거사용 폭탄 4개와 자살용 폭탄 1개를 소지하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를 시도한 때부터 김 선생의 독립운동은 시작된다.
[편집자]


 암흑기를 살아가는 이들은 현실 순응이냐, 현실 극복이냐는 선택의 기로에서 고민하게 된다. 36년 동안의 일제강점기 역시 다르지 않았다.
이 당시 그 누군가는 암흑 속에서 새로운 길을 내는 삶의 방식을 택했고, 또 다른 누군가는 암흑 속에서 쌀독을 채우는 적자생존의 방식을 택했다. 그래서 훗날을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그들의 살아갔던 길을 재조명해야 하는 과제가 부여된다.

특히 오늘 우리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바로 목숨을 담보한 독립투사들에 의해 개척되었다는 점에 주목할 때 우리에게는 과거를 올바르게 조명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주어진다. 해방 직후 몰아닥친 다사다난한 이 땅의 암흑은 진실과 사실을 굴절시키며 종종 외도의 길을 가곤했다. 그래서 어깨에 짊어진 책임과 의무는 더욱 무겁기만 하다.

예외 없이 구미를 거쳐 간 일제 강점기. 36년이라는 짧지 않은 굴욕과 수치의 그 기간 수많은 구미 출신 인사들은 잃어버린 나라를 찾기 위해 일제와 당당히 맞서 싸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일부 인사는 이념 논리로 재단되면서 본질을 심하게 훼손당해야 했고, 일부 인사는 역사와 세상의 무관심 속에서 잊히는 비운의 세월 속에 묻혀야 했다.

구미시 원평동 324번지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와 맞선 독립투사 김정술(1909-1964년) 선생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일제 강점 기간 최대 독립운동단체로 맹활약을 한 신간회와 최대 사건 중의 하나인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과 밀접한 교감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앞장선 김정술 선생이 아직도 독립운동가로서 역사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으니, 세상무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수치일 수밖에 없다.

가슴을 더 쓰리게 하는 것은 독립투사로서의 길을 걸어온 남편의 삶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을 부인 최복인 여사가 백방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 김정술>이라는 역사적인 평가를 접하지 못하고, 지난 2005년 남편의 곁으로 돌아갔으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서럽다고 해서 묻힌 역사를 방관할 수 마는 없는 일이다. 김 선생의 아들인 김일식(1940년생), 김구식(1950년생) 씨와 딸 김경화(1956년생) 씨 등은 그 서러운 역사 속에서 아버지의 독립투혼을 세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보이지 않는 누군가와 싸우는 세월의 삶을 살고 있다.

 

↑↑ 김정술 선생과 대구교보 동기 [ 사진 제공= 둘째 아들 김수식 선생 제공]


<김정술 선생과 조선은행 폭탄테러 사건>
구미와 인근지역의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왕산 허위, 박정희 대통령의 둘째 형인 박상희, 장진홍 선생이다. 이 중 김정술 선생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을 주도한 칠곡 인동(지금의 구미시 인동동)의 장진홍 선생(1895-1930년)과 신간회 선산지회 조사부 총무였던 구미 출신 박상희 선생(1906~1946년)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특히 1909년생인 김정술 선생은 1909년생인 박상희 선생의 고향 후배이면서 동시에 구미 공립보통학교 (지금의 구미초교) 2회로서 12회인 박정희 대통령의 10년 선배였다. 특히 당시 구미 독립운동사의 중심에 서 있던 박상희 선생과 신간회 활동을 함께 했다는 사실은 인상적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당시 김 선생이 관여했던 신간회의 성격은 무엇이었으며,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은 어떤 내용이었을까.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사회주의, 비타협적 민주주의 세력들이 결집해서 창립한 좌우합작의 거대 독립운동단체였다. 1931년 5월까지 4년여 동안 일제와 맞선 이 단체는 전국은 물론 해외에 지부에 3~4만 명의 회원을 거느릴 만큼의 거대 조직이었다.

이처럼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던 신간회는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쟁취와 동양척식주식 회사 반대, 근검절약 운동, 파벌-족벌주의 타파 등을 활동 목표로 삼아 일제와 맞섰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은 장진홍 선생의 주도로 1927년 10월 16일 거사용 폭탄 4개와 자살용 폭탄 1개를 제조해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민족운동이었다. 은행 간부에게 발각돼 수포로 돌아갔으나, 폭탄 속의 뇌관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순사 4명과 은행 사환, 행인 1명 등 6명이 다쳤다.

선물 상자로 위장, 심부름꾼을 시켜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전달된 당시의 폭탄은 1927년 10월 16일 장진홍 선생이 칠곡의 집에서 제조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경상북도지사와 경상북도 경찰부, 조선식산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하기 위해 폭탄을 제조하기까지는 무수한 우여곡절이 뒤따랐다. 특히 금오산 근교의 깊은 산 속에서는 폭풍우 치는 한밤중을 이용해 무수한 실험을 거쳤다.

당시 구미 공립보통학교 졸업 후 대구고등보통학교(대구고보/ 현 경북 중고교)에 입학하면서 1927년 2월 15일 발족한 신간회에 몸을 담은 김정술 선생은 열차를 이용해 구미-대구를 오르내리면서 폭탄실험에 필요한 폭약류를 책가방 속에 넣고 운반했다. 결국 학생 신분인 김정술 선생의 책가방 속에 숨겨 운반된 폭약은 금오산 깊은 산속에서 폭탄제조를 위한 실험에 쓰였고,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를 위한 폭탄 제조의 원료로 쓰였다.

장진홍 선생은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이 미수에 그치자, 친척을 통해 안동의 주요 시설을 폭파할 수 있도록 폭탄을 제조해 전달한 데 이어 친구를 통해 영천 거사를 위한 폭탄을 전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미수에 그치면서 일본 경찰은 장진홍 선생을 비롯한 가담자를 체포하기 위해 구미지역 인근을 벌집쑤셔 놓듯 했다.

당시 경북 경찰부 요주의 인물로 주목된 김정술 선생에게도 수사망은 좁혀들기 시작했다. 결국 1927년 11월 10일 경북 경찰부 고등과 사상범 전담 요원인 최석현 경부보와 형사 3명은 대구에서 구미로 올라와 신간회 산하 구산 구락부원인 김정술 등 2명을 검거하고, 대구로 압송한 후 대구시 유치장에서 취조하기 시작했다.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은 조선일보 11월 14일 자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경북 경찰부원이 돌연 신간 회원 검거-불안에 쌓인 구미 일대>라는 제하의 기사에서는 "경북경찰부 고등과에서는 돌연히 긴장한 중에 최석현, 경부보는 형사 3명을 데리고, 구미까지 가서 신간회 선산지부 총무 박상희, 구산 구락부원 윤재우, 김정술 씨를 검거한 후에 신간지회 사무실과 3씨의 집을 수색한 후에 지난 10일(1927년 11월10일) 오후 3시경 대구로 압송하여 유치장에다가 유치했다.
방금 극비리에 취조하는 중인 바 모처로부터 탐문한 바에 의하면 방금 구미에서는 조금만 수상한 사람이 지나가면 즉시 불문곡직하고 검속함으로 인하여 현재 구미 사람들은 매우 공포에 쌓여 있는 모양이더라"

1927년 당시 조선일보가 보도한 기사를 보면 계엄하에서 미수에 그친 폭탄 사건 계획이 얼마나 구미 전역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는지를 직감할 수 있다. 특히 그 중심에 신간회 소속의 박상희 선생과 김정술 선생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구금된 김정술 선생과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의 연루 관계를 취조한 것은 해방 후 인동읍장을 지낸 선산경찰서 윤갑덕 형사였다. 가족에 따르면 남편 김정술 선생을 떠나보낸 후인 70년대 초반, 부인인 최복인 여사는 윤갑덕 형사를 만나 조선은행 폭탄 사건 당시 김정술 선생을 취조했다는 자술서를 확보했으나, 자술서는 훗날 장씨 집안으로 넘겨진 후 분실되고 말았다. 44년부터 50년까지 6년 동안 구미초교 교사를 지낸 최복인 여사의 애타는 심정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실감케 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 일제 강점기의 구미 원평동 [사진 출처 = 구미시]



<고문과 석방, 그리고 일본으로>
나이 어린 학생 신분으로 유치장에 감금된 김정술 선생은 새벽 2~3시경 고문실에서 모진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물을 먹이는가 하면 책상 위에 손을 묶어놓고 대나무 침으로 손톱 밑을 찌르는 죽음의 고문은 수개월째 지속됐다.

다행스럽게도 김정술 선생이 석방된 것은 서장실을 방문한 대구고보 교장의 특별 탄원과 보증 덕분이었다. "새벽에 교장 선생님은 댁까지 데려다가 목욕물을 데워주고, 새 옷을 입으라고 건네주셨다"고 회고할 만큼 김 선생에게 대구고보 교장은 생명의 은인이기까지 했다.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탄 사건 여파의 악몽을 딛고 대구고보를 졸업한 것은 1928년 3월이었다. 이후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법정대학과 체육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인 1929년 일본으로 도피한 장진홍 선생은 그곳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은 지 1년 후인 1930년 7월 31일 자결하게 된다.

일본에서 학업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김정술 선생을 따라다닌 것은 독립운동 전력이었고, 이 전력은 사회진출을 가로막았다. 이래서 택한 곳이 바로 독립운동가가 집결하고 있던 만주였고, 독립을 위해서는 젊은이들을 교육시키는 길뿐이라는 일념으로 길림성 용정에 있는 영신(광명)중학교에서 인재 양성에 몰두했다. 당시 김정술 선생이 가르친 제자는 정일권 전 국무총리, 이주일 전 감사원장, 윤태일 전 서울시장, 김동하 전 해병대 사령관, 이종갑 씨 등이었다.


<해방, 작고하기까지>
1927년 모진 고문의 악몽을 딛고 해방을 맞이하기까지는 18년 세월이 흐른 후였다. 해방과 함께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온 김정술 선생은 후학을 양성하는 길에 전념했다. 경기상업, 수도여고, 용산고 등을 오가면서 수학과 영어, 체육을 가르치는데 전념한 김 선생은 그러나 지병과 싸워야 했다. 어린 나이에 수개월째 고문으로 망가진 심신이 지병을 앞세우고 선생을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1949년 고향인 구미로 돌아온 김 선생은 지병이 호전된 1960년 선산토지 개량조합장으로 재직하다가 1964년 5월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선생을 둘러싼 주변 세상은 냉정하기까지 했다. 선산토지 개량조합장을 탐낸 일부 인사들이 있지도 않은 비리를 날조해 투서를 해대기 시작하면서 선생을 괴롭혔다. 끝내 도지사실로 불려가 퇴임을 종용받고 돌아온 선생의 억울함을 전해들은 최복인 여사는 서울에 있는 선생의 제자들을 찾아 눈시울을 붉혔고, 제자들 역시 선생의 억울함을 바로 잡아드리겠다고 약속했으나, 시간은 이미 선생 편에 있지 않았다.

최복인 여사가 머나먼 길을 오르내려 곁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김정술 선생은 세상 밖으로 발길을 내딛기 시작하고 있었다.

일부 제자들은 선생에게 대한체육회장직을 맡아 줄 것을 종용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생은 극구 사양했다. 고향을 위해 마지막 봉사하는 길이 최선의 길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둘째 아들인 김구식 대표는 이래서 더욱 가슴이 아프기만 하다.
" 일제 강점기 속에서 일제 만행에 맞서 싸운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세상이 아버지의 소중한 애국심을 외면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오늘도 세상 밖으로 밀려나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아버지 김정술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가족들, 암흑기 속에서 길을 낸 독립투사의 뜨거운 애국심에 힘입어 우리는 지금 밝은 길을 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김정술 선생에게 해야 할 몫은 무엇일까. 아직도 김정술 선생은 독립운동가로서의 역사적인 평가를 받지 못한 채 비운의 암흑 속에 묻혀있다.

김경홍 기자 siin0122@hanmail.net 기자  114dd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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