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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문화타임즈의‘우리의 얼 되찾기 운동’/구미 지역 동네의 옛 이름을 찾아 (2) 형곡동
김영민 전 구미•대구 YMCA 사무총장 / k문화타임즈 공동 고문 겸 논설위원장
2022년 08월 20일 [K문화타임즈]

늘 비판과 격려를 해 주시는 네티즌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얼 되찾기의 가치관을 지향하는 k문화타임즈가 ‘우리의 얼 되찾기의 운동’에 나섭니다.

그 일환으로 김영민 필진이 ‘구미 지역 동네의 옛 이름을 찾아서’, 송기남 필진이 우리나라 항일 운동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제주항일 운동사’를 각각 연재합니다.
[편집자] 


◇김영민 k문화타임즈 고문 겸 논설위원장
대표적인 시민 운동가입니다.
구미 YMCA, 대구 YMCA 사무총장을 역임했습니다.
잊혀진 구미의 지명 살리기와 관련한 칼럼을 연재합니다.


◇송기남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
제주 4•3 민주 항쟁과 제주 생태(자연, 인문) 분야에서 오랜 활동을 해 오신 제주지역의 대표적인 시민•사회 활동가입니다.
제주항일 운동 칼럼을 연재합니다.
<편집자>

☛구미 지역 동네의 옛 이름을 찾아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구미를 느끼고 살아왔는지 각 동의 이름을 중심으로 그 유래와 내용을 통해서 살펴본다.
<필자>

2, 형곡동(시무실마을, 사창마을)


금오산의 효자봉과 남동고개(지금의 금오산 전망대)에서 내려오는 두 개의 골짜기인 부엉이곡과 불당곡 일대를 개발하여 형성된 동네로써 옛부터 가시나무가 많은 골짜기라 하여 가시나무 형(荊)과 골짜기 곡(谷)을 합쳐 형곡이라 불렀으며, 소쿠리 모양이 한 동네였다고 한다.

원평동과 송정동과 함께 같이 형성된 구미시에서 가장 먼저 형성된 원도심에 해당한다. 동시에 개발 초기 구미시의 교육과 주거 기능을 위해 설계되었다.

구미시의 구미가 거북이의 꼬리를 의미하듯이, 육각형의 거북이 껍질의 모양을 형상화하여 시가지를 설계하였고, 형곡동이 거북이의 몸통이라면 송정동은 그 꼬리에 해당한다. 이를 증명하듯 형곡동의 정중앙에 위치한 구미시립 중앙도서관에는 거북이 모양의 석상이 굉장히 많이 있다. 도로선형은 잘 닦여 있으나....

구미의 성장과 함께 주거와 교육의 중심지로써 한때 부촌의 이미지가 강했던 도시였으며, 경상북도에서 제일가는 학원 도시에 해당하였으나 지금은 많이 쇠퇴하여 그 명성이 꽤 추락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구미시에서 대부분의 학원은 이 동네에 있을 정도.


과거에는 신시동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아직도 송정동과 이어주는 송정대로의 종점이 신시로라는 것을 보면 그 옛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금오산의 품에 다소 안기듯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들 좋고 수세 좋기로 유명한 이곳 형곡은 시무나무(가시나무 옛말)가 많아 형곡이라 불렸으며 시무실이라는 상형(上荊, 지금의 형곡2동)과 신라 때 양곡을 보관하던 창고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사창(司倉)이라는 하형(下荊, 지금의 형곡1동)의 두 개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형곡동 이야기 2, 향랑의 죽음 
향랑의 노래 ‘산유화가’/생육신 이맹전의 유허비와 향랑(香娘, 1683~1702)의 노래비가 있다. 도서관 건물 뒤쪽 정원에 이맹전(1392~1480) 유허비와 향랑의 노래비가 있다. 생육신 가운데 한 분인 이맹전의 유허비는 단청을 칠한 비각 안에 모셔져 있고, 향랑의 노래비는 3단으로 된 돌 기단 위에 자연석을 얹은 형태였다.

‘烈女 香娘 노래 碑’를 새긴 자연석 아래 그가 남겼다는 노래 ‘산유화가’가 오석에 새겨져 있다. 향랑은 고아 봉한리의 약가(藥哥)와 마찬가지로 열녀비로 기려지는 양인이다. 그는 남편의 학대와 폭력, 이를 보다 못한 시아버지의 재가 권유조차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른바 ‘일부종사(一夫從事)의 의’를 지킨 여인으로 나라의 정려를 받았다.

향랑은 숙종 때 일선부(一善府) 상형곡(上荊谷, 지금의 구미시 형곡동)에서 태어났는데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비가 후취를 들였는데, 이 계모가 모진 여자라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열일곱에 같은 마을의 세 살 아래인 임칠봉과 혼인했으나, 칠봉은 성질이 고약하여 손찌검과 패악이 극심했다.
그의 폭력과 학대를 견디다 못해 향랑은 친정으로 갔으나 계모는 그를 모질게 내쳤다. 부친이 그를 숙부에게 보내자, 조카를 부담스러워한 숙부도 재가를 권했다. 이를 거절한 그는 결국, 남편의 폭력과 학대가 기다리고 있는 시가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 형곡동 뒷산에 있는 향랑의 무덤 앞 사당 정렬사. 1992년 구미문화원에서 묘역을 정비하고 이 사당을 세웠다.

시부조차 재가를 권유하자 마침내 향랑은 죽기를 결심하고 야은 길재의 충절을 기려 세운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아래 있는 오태소(吳太沼)에 몸을 던져 죽으니 꽃다운 열아홉이었다. 선산 부사 조구상이 향랑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삼강행실도를 모방하여 ‘열녀 향랑 의열도(義烈圖)’를 그려 조정에 알리니 숙종 29년(1703)에 나라에서 정려(旌閭)하였다.

‘산유화가’의 변주와 향랑 서사 설화 정착
향랑이 죽기 전에 한 초녀(樵女)에게 남긴 노래가 ‘산유화가’다. ‘산유화가’는 메나리(강원도와 경상도, 그리고 충청도 일부 지방에 전승되는 민요)의 한역(漢譯)으로, 고문헌에는 백제의 가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조선 숙종 때 선산의 향랑이 지었다는 설 등이 전하니, 이 노래는 구전된 민요인 듯하다.
天何高遠(천하고원) 하늘은 어이하여 높고도 멀며/地何廣邈(지하광막) 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고.
天地雖大(천지수대) 하늘과 땅이 비록 크다고 하나/一身靡託(일신미탁) 이 한 몸 의탁할 곳 없다네.
寧投江水(영투강수)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서/

葬於魚腹(장어어복) 물고기 배 속에 장사 지내리라.


▲ 향랑이 투신한 오태소 부근에 있는 '지주중류' 비. 야은의 충절을 기린 비

 

이 평민 여성의 절행(節行)에 감명받은 사대부들이 이를 민간에 전하면서 향랑의 서사는 노래뿐 아니라, 서술자의 관점에 따른 윤색이 두드러진 ‘전(傳)’의 형식으로 소개되었고 ‘설화’로도 정착했다. 설화는 향랑의 ‘열녀성’을 강조하지만, 실제 이 설화는 계모와 남편의 학대가 중심 모티프여서 ‘학처형(虐妻型) 설화’로 분류된다.


산유화가는 구전되면서 지금의 채록본에는 “구경 가세 / 구경 가세 / 만경창파 구경 가세 / 세상천지 넓다 해도 / 이 몸 하나 둘 데 없네 / 차라리 물에 빠져 / 물고기의 배 속에나 장사하세”로 바뀌어 전승되고 있다.
문인들은 ‘산유화’를 여러 가지로 지어 불렀는데 특히 이안중은 <향랑전>을 짓고 향랑의 ‘산유화’가 너무 속되므로 다시 고쳤다며 세 편을 짓기도 했다. 그중 한 편은 “산에 꽃이 피었으나 / 나는 홀로 집이 없다네 / 그래 집 없는 이 몸이란 / 꽃보다도 못하다오.(山有花 / 我無家 / 我無家 / 不如花)”다.
향랑 설화는 <동국문헌비고>·<영남악부>·<일선읍지>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한 가람문고의 <일선의열도>가 가장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전문 연구 가운데 “향랑은 열녀가 아니라 18세기경 가부장제가 정착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고려대 정창권)라고 보기도 한다. 어쨌든 지역에서는 구미 시립 중앙도서관 뜰에 향랑의 시비를 세우고, 형곡동 뒷산 기슭의 향랑 묘 부근에 사당을 짓고 묘비를 정비하는 등으로 그의 열행을 기리고 있다.


▲ 향랑의 묘 앞 열녀비. 가운데에 세월을 견디면서 두 동강이 난 몸돌을 때운 흔적이 보인다. .

원형의 삶과 진실 찾기는 뒷사람의 몫
열녀, 또는 열부(烈婦)는 ‘남편이 죽은 후에 수절하거나 위난 시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여성’이다. 유교 사회에서 부부관계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과 수절(守節)’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는데 이는 중세 봉건사회를 유지하는 가부장적 질서의 기초였다.

 


▲ 사당 뒤편에 있는 향랑의 무덤과 빗돌. 오석으로 지은 새 비 앞에 자연석으로 만든 옛 열녀비.

조선왕조에서는 이 유교적 여성관을 널리 알리고 후세의 규범으로 삼고자 관련 서적을 펴내고 이를 실천한 여성을 ‘정려’하면서 열녀는 저절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이 일부종사의 봉건적 여성관이 꾸준히 학습된 결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수많은 열녀가 생산되었다. 열녀 이데올로기는 조선 후기로 가면서 상층계급에서 하층계급으로까지 침투되어 조선 사회에 일반화되어 갔다. 19세기 말 심지어는 20세기까지도 열녀가 나왔던 이유다.
숙종 때의 향랑이 열녀로 정려된 것은 적잖이 특수한 예다. 향랑은 남편이 죽은 것이 아니라, 남편의 극심한 학대에도 일부종사의 의를 지켰다. 시부까지 권유한 재가를 끝내 거부하고 그는 스스로 자진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불경이부(不敬二夫)’를 관철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양인 향랑을 정려하여 그의 수절을 기린 것이다.



▲ 무덤에서 바라본 정렬사. 무덤앞 크고 높은 새 비석이 묵은 열녀비를 압도한다.;

향랑의 묘 앞에 세운 옛 빗돌도 약가와 석이의 빗돌과 닮았다. 거친 자연석의 질감이 묻어나는 빗돌에서는 잘 다듬어진 오석(烏石)과 값비싼 석재에서 보이는 위화감이 없다. 세월을 견디면서 두 동강이 난 몸돌을 때웠지만, 1992년에 새로 세운 오석에 지붕돌을 얹은 크고 세련된 새 묘비보다 훨씬 정겹고 편안하다.
그 당대에는 석재를 달리하고, 덮개돌을 얹는지에 따라 그 신분을 드러내었을지언정 풍화를 견디며 살아온 빗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새기는 것은 뒷사람의 몫이다. 충효든, 열이든 그것이 투영하고 있는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그 가공되지 않은 원형의 삶과 그 진실을 들여다보는 일 말이다.



▲ 충노(忠奴) 석이지비(石伊之碑)

형곡동 이야기 3. 미군 폭격기 모심듯 융단폭격... 매년 음력 7월 3일 밤이면 집집마다 불 켜는 구미 형곡동(영남일보, 2021-09-14)

경북 구미시 형곡동은 1951년부터 매년 음력 7월 3일에는 한밤중에도 집집이 불이 환하게 켜진다. 마을 주민 대부분이 같은 날에 제사를 지내기 때문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전쟁에도 안전하다고 소문이 난 형곡동은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8월 16일(음력 7월 3일) 미군 폭격기의 항공 폭격으로 주민 130여 명의 억울한 목숨을 앗아간 곳이다. 이날 미군 폭격기 8∼9대가 형곡동 일대를 융단 폭격하고, 기관총을 쏘아 130가구가 살던 마을은 쑥대밭이 됐다. 당시 요행히도 살아남은 주민은 "마을 도랑에 핏물이 흐를 정도로 참혹했다"고 한결같이 입을 모았다.

대구함락 우려한 맥아더 장군 "왜관 북쪽 황무지 만들라" 명령 폭격 1시간 만에 사망자 130여 명 마을주민 대부분 같은 날 제사

유족 측 진실규명·피해보상 요구, 정부 등은 소극적 답변만 내놔,과거사정리위 지원사업 권고에 66년 만에 희생자 위령탑 건립

◆아무 경고 없이 시작된 미군 폭격
1950년 여름은 6·25전쟁은 매우 유동적이었고 잦은 혼란을 겪던 시기로 인민군은 별다른 저지 없이 빠른 속도로 남한으로 밀고 내려왔다. 금산~영동~함창~안동선까지 진출한 인민군은 미군과 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낙동강을 건너 연합군 전선이 강화되기 전에 조기 결전을 강행했다.

당시 유엔군은 우회 기동, 포위와 야간 침투를 조직적으로 저지할 충분한 병력이 부족했다. 국군은 산악지대와 동해안 지역을 담당하고 미군 제24사단은 김천·군위·의성에서 재편성했다. 미군 제1기병사단은 영동 일대를 담당하고 미군 제25사단은 상주 정면을 방어하면서 우세한 공군에 의한 폭격으로 남하를 저지하려는 지연작전을 펼치는 상황이었다

구미시 형곡동은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로 6·25전쟁에도 안전하다고 소문이 난 곳으로 마을주민은 피란을 가지 않았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낙동강을 미처 건너지 못한 다른 지역 피란민도 많이 모여들었다. 폭격이 있었던 1950년 8월 16일 마을주민은 평소와 다름 없이 밭일을 하거나 쉬면서 일상생활을 보냈고, 피란민은 형곡 냇가에서 더운 날씨를 피할 수 있는 하얀 천으로 천막을 쳐 놓고 있었다.

시무실 마을(70가구)과 사창 마을(60가구)로 나눠진 형곡동에는 폭격 당시 인민군은 없는 상태에서 아무런 경고 없이 폭격이 시작됐다. 그러나 "폭격 당일 아침에 인민군 4명이 마을로 내려와 돼지를 잡아갔다"라고 증언한 기록은 남아있다.

폭격 목격자는 "1950년 8월 16일 오전 8시쯤 비행기 정찰에 이어 오전 10시쯤 B-29 폭격기 2개 편대가 남쪽에서 날아와 1시간 동안 폭격과 기총 소사 공격이 있었다"고 한결같은 증언을 했다. "이날 폭격으로 시무실과 사창 마을의 희생자는 131~133명에 이른다. 형곡 냇가에 모여있던 수많은 피란민이 희생되면서 사상자 핏물이 한여름 냇가에 흐를 정도로 참혹했다"는 증언도 여러 곳에 기록돼 있다.



◆미군 문서에 "융단 폭격 준비"
미군 문서에는 '1950년 8월 16일 미군 1기병 사단에 구미시 형곡동을 포함한 사각 지역에 B-29 융단 폭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1988년에 발간된 푸트렐(Futrell) 박사의 논문에는 '1 기병사단 병력은 8월 16일 칠곡군 왜관의 사각 지역에 B-29 융단 폭격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8월 15일 공군은 총 260회 출격했고, 이 가운데 120회는 한국군 지역, 68회는 1기병사단 지역, 43회는 24·29·25사단 지역에서 이뤄졌다'라고 했다.

푸트렐은 '이날 폭격은 맥아더 장군의 지시와 오도넬 준장의 지휘로 이뤄졌고 미군은 폭격 지역을 12곳으로 나눠 지역당 폭격대대를 보내 자유낙하 폭탄 500 파운드형 3천84기와 1천파운드형 150개를 투하했다. 북한군의 8월 공세로 임시 수도였던 대구의 함락이 우려되고, 인민군은 낙동강 건너에서 병력을 증강하는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은 스트레이트 메이어 장군과 오도넬 장군을 불러 B-29를 총동원해 왜관지역 융단 폭격 임무를 부여했다.

왜관 북쪽의 일정 지역을 황무지로 만들라는 맥아더의 지시에 따라 폭격의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임무를 수행한 것은 심리적 효과 때문으로 폭격 지역 언저리의 형곡동은 인민군 소재와 관계없이 대구를 지키려고 펼친 융단폭격의 대상이 됐다'라고 기록했다.

◆"마을에는 인민군 없고 피란민뿐"
2008~2010년까지 정부의 진실화해위원회는 형곡동 폭격을 목격한 주민을 대상으로 목격자 진술과 증언을 녹취했다. 당시 진술인은 한결같이 "형곡동에는 인민군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피란민 수백 명이 모였고, 남쪽으로 3㎞가량 떨어진 산악지대 3곳에 인민군이 집결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미군 폭격으로 부모를 한꺼번에 잃은 강응구(당시 21세) 씨는 "미군기 폭격 전날에는 정찰기를 확인했고 폭격일 오전 10~11시에는 전폭기 8대의 기총소사와 폭격으로 마을 뒷산인 토깡골에서 소먹이를 하던 아버지와 집에 계시던 어머니가 모두 돌아가셔서 형님과 함께 부모님 시신을 수습했다"고 증언했다.

가까운 이웃과 친인척 11명이 폭격으로 숨진 것을 목격한 박태식(당시 19세)씨는 "1950년 음력 7월 2일 오전 8시쯤 프로펠러가 달린 정찰기 1대가 산 높이와 비슷한 고도 300m에서 2바퀴 돌면서 정찰을 했고 다음 날에는 전폭기 8대가 편대를 이뤄 남쪽에서 날아와 5분 정도 폭격했다. 2㎞ 떨어진 사창마을보다 시무실 마을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됐고, 사창 마을에선 형곡 냇가를 집중적으로 폭격했다"고 진술했다.

어머니와 누나·여동생이 희생된 김교탁(당시 15세) 씨는 "미군 폭격이 시작된 오전 11시에 가족은 모두 집에 있는 상태에서 폭탄이 떨어져 아버지와 자신은 구사일생해 가족의 시신을 수습했다. 시무실과 사창 마을 130~140가구는 모두 파괴되거나 불에 탔다"고 기억했다.

형·누나·고모부가 미군 폭격으로 사망을 목격한 김재수(당시 11세) 씨는 "폭격 당시 사망한 가족은 시무실 집에서 쉬고 있었고, 오전 11시쯤 갑자기 전폭기 4~5대가 날아와 논에 모를 심는 형태로 집중적으로 포격하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라는 목격담을 녹취록에 남겼다.

◆정부·미국, 사망자 피해 보상해야
미군 오폭 피해 유족으로 구성된 형곡동 위령탑건립위원회는 1992년 국방부에 진실 규명과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으나 "미국의 ‘미’도 꺼내지 말라"는 냉담한 답변만 돌아왔다. 형곡동 위령탑건립위원회는 1992년과 2005년 두 차례에 걸쳐 또다시 위령탑 건립을 요구하는 진정서를 구미시에 냈으나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답변뿐이었다. 현재 피해 주민과 유가족은 "미군 오폭으로 형곡동 주민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사실이 명백히 밝혀진 만큼 정부와 미국은 사망자와 유가족에 대한 명예 회복과 피해 보상에 나서라"고 요구했다.

훗날 확인된 미군 문서에는 '미8군은 형곡동·왜관읍 등에 B-29 융단 폭격을 준비하라'고 명령한 내용이 확인됐다. 미군은 임시 수도였던 대구의 함락을 우려해 적군의 전투력과 사기를 꺾을 목적으로 인민군 병력이 은신했다고 의심한 민간인 마을을 폭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형곡동 희생자 유가족들의 당시 마을엔 인민군이 없었다는 진술에 따라 과거사위원회는 미군 폭격을 인정했다.

1992년 결성된 형곡동 위령탑건립위원회는 2006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정서를 넣었다. 과거사정리위원회는 '2010년 6월 미군 폭격으로 최소한 29명이 사망했다고 규명한 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희생자 위령 사업을 지원하라'고 권고했다. 이에 따라 2016년 8월 구미시 형곡동 산33-5에서는 6·25전쟁 당시 미군 폭격기의 오폭으로 희생된 고인들의 넋을 달래자는 주민과 유족의 노력으로 66년 만에 '6·25전쟁 형곡동 폭격희생자 위령탑'이 세워졌다.


 <기획 관련 사진/  필자 제공> 

김미자 기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114dd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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