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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비극 제주 4•3 (6) 7년 반에 걸쳐 일어났던 죽음과 그리고 거대한 항쟁
2022년 07월 20일 [K문화타임즈]


K문화타임즈  송기남 논설위원이  한국 현대사의 비극 제주 4․3 민주 항쟁을 6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


1949년에 들어 군, 경 토벌대는 제주에서 민간인 학살이 극에 달한다. 집 밖으로 한번 끌려 나가면 그날로 칠성판을 짊어지고 저승길이다. 감옥에는 죽음의 순서대로 끌려온 사람들이 가득하다. 먼저 끌려온 사람들은 바닷가로 이동해 학살하고 비행장으로 이동해 학살하고 돌을 매달아 바다에 버려지고 학살터에서 집단 암매장당한다.
그런에도 감옥이 모자란다. 경찰서와 고구마 전분 공장 창고를 모두 채워도 수용할 공간이 모자란다.
감옥이 넘친다고 민간인들 끌고 오는 것을 중단하거나 수용인들울  석방하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배에 태워 육지의 감옥으로 보낸다. 목포형무소, 대전형무소, 대구형무소, 서울까지 보낸다. 이분들은 지금도 돌아오지 못한 민간인들이다. 행방불명으로 처리됐거나 가족의 행적을 알 수 없어 신고조차 못한 경우도 있다. 피붙이 부모 형제 자손이 모두 학살당한 경우는 누가 대신 신고해 줄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 누구의 묵숨을 겨누었던 총알인가. 섯알오름 학살터에서 발굴된 실탄
[사진 제공 = 송기남 논설위원] *무단복제 DB 금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한다. 군부대 긴급회의에서 6월 27일까지 전국에 요주의 인물을 모두 재수감 할 것을 명령한다. 모슬포 주둔 해병부대는 1950년 7월 16일과 8월 20일 새벽에 모슬포 송악산 섯알오름에 있는 일본군 탄약고 자리에서 대량 학살을 감행한다.
해병대 모슬포 부대에서 차출한 대원들이 섯알오름 일본군 탄약고가 해방 후 미군에 의해 폭파돼 물웅덩이가 된 이곳으로 출동시킨다. 중대장과 소대장이 미리 현장에 대기하고 있다가 해병대 대원들에게 실탄을 나눠주면서 한 사람이 민간인 한 사람씩 총살하도록 명령한다. 이어 민간인을 잔뜩 실은 트럭이 탄약고 터에 도착한다. 차에서 내리는 민간인을 한 사람씩 물웅덩이 근처에 세워놓고 군인들은 1열 종대로 서서 명령에 따라 한 사람 한 사람씩 총살한다. 그리고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들을 물웅덩이로 떨어뜨린다. 이것이 섯알오름 예비검속 민간인 학살이다.

 

 

↑↑ 섯알오름 학살터 구덩이. 일본군 탄약고를 미군이 폭파시킨 곳이다.
[사진 제공 = 송기남 논설위원] *무단복제 DB 금지



이때 모슬포 감옥에서 새벽에 끌려 나오게 된 민간인들은 공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동이 트기 전 캄캄한 새벽에 석방이 아닌 어디론가 트럭에 실려 이동해가는 걸 보고 불안했다. 날이 밝으면 가족들이 먹을 것을 챙겨 감옥으로 면회라도 오는데,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어 묻히면 가족들이 찾아 헤맬 것을 생각해 섯알오름으로 실려가며 신고 있던 검정 고무신을 한 짝씩 한 짝씩 중간중간 벗어 던지면서 간다.

학살이 끝나고 검은 고무신을 추적하며 찾아가 시신을 꺼내다가 군인들에게 들켜 혼이 나고서야 남편의 시신을 포기하겠다고 사정하며 목숨만 살려달라고 사정했던 주민도 있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학살과 감시로 아무도 가족의 시신조차 수습해 장례 치를 엄두를 못 낸다.

 

 

↑↑ 섯알오름 학살터 구덩이. 일본군 탄약고를 미군이 폭파시킨 곳이다.
[사진 제공 = 송기남 논설위원] *무단복제 DB 금지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에 들어가고 1954년 9월 21일자로 한라산에 자유통행이 가능해지는 금족령 해제가 되어도 학살자 가족들의 유골수습 진정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로 끊임없이 진정서를 올리면서 1956년에야 허락을 받는다. 1956년 3월 29일 한림, 한경 지역 주민 시신 62구가 수습돼 금악리 지역 만벵듸 묘역을 조성해 옮겨간다.

그리고 동년 5월 18일 149구의 시신을 수습했으나 한꺼번에 몰살해 한구덩이에 6년 째 방치된 시신들이 얽힌 채로 썩어 각자의 신분을 확인은 불가능했다.
요즘처럼 유전자 검사가 안되던 시절이므로 대충 머리뼈 하나에 두개의 팔 뼈와 두개의 다리 뼤를 맞추어 수습하고 한곳에 묘지를 조성해 함께 장례를 치른다. 이것이 100명의 조상의 한 자손으로 명명된 백조 일손 지지. 묘역이다.

 

 

↑↑ 섯알오름 학살터 구덩이. 일본군 탄약고를 미군이 폭파시킨 곳이다.
[사진 제공 = 송기남 논설위원] *무단복제 DB 금지



제주에서 일어났던 4,3 항쟁은 일제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새로운 조국 건설의 깃발을 세우는 과정에 미군정의 간섭과 일제에 부역했던 친일 경찰들과 이들의 후원부대 노릇을 하던 서북청년단들의 역공으로 인해 씻을수 없는 희생을 치르게 된다.
1947년 28주년 3 ,1절 행사에 미군정 제주 경찰이 제주 도민에게 실탄 사격은 누구의 명령에 충성했는가?

↑↑ 섯알오름 예비검속자 학살터. 위령비 앞에 노인의 검정고무신들은 끌려가던 그날의 흔적을 재현한 것이다.
[사진 제공 = 송기남 논설위원] *무단복제 DB 금지


1947년 3월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장장 7년 반 동안에 3만 5000여 명이 학살되는 동안 미군은 몇 명이나 죽었는가? 친일 경찰들을 골라서 쓰고 무기를 지원하고 지휘권을 가졌음에도 그들은 단 한명도 죽지도 않았을 뿐아니라 지금까지 공식적인 사과한번 없었다. 7년 반에 걸쳐 일어났던 이 거대한 죽음과 항쟁의 어찌 몇 편의 줄거리로 다 설명하리오.

 

↑↑ 섯알오름 예비검속자 학살터. 위령비 앞에 노인의 검정고무신들은 끌려가던 그날의 흔적을 재현한 것이다.
[사진 제공 = 송기남 논설위원] *무단복제 DB 금지



화해와 상생 평화를 위하여 비극을 몰고 온 미국과 이승만 일당의 후예들은 반드시 사죄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사죄가 있음으로 해서 희생된 유죄들이 ‘ 당신들이 속죄하므로 우리도 용서한다’ 라는 화답이 있을 때 비로서 화해와 상생 평화는 이 땅에 아픔을 딛고 꽃이 필 것이다.
<감사합니다. 연재를 마칩니다.>

[필자 약력]
 
↑↑ 송기남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

송기남
제주 서귀포시 중문동
전 제민일보 서귀포 지국장 역임
전 조천읍 농민회 회장 역임
현 제주 새별문학회 회원
(사) 곶자왈 사람 회원
현제 제주 생태, 역사문화 해설사로 활동 중
제주 사삼 김창수 선생 기념사업회 준비위원장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

김미자 기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114dd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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