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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한국 현대사의 비극 제주 4․3 (5) 연좌제의 꼬리표
2022년 06월 21일 [K문화타임즈]





송기남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이 한국 현대사의 비극 제주 4․3 민주 항쟁을 6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

 
↑↑ 송기남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


1948년 10월에 접어들면서 군,경 토벌대들은 토끼사냥을 하듯이 제주도 해안선에서 떨어져 있는 산간마을로 밀고 들어간다. 군,경 토벌대는 산간마을 주민들에게 해안선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거동이 불편해 이주하지 못한 노약자들과 추수한 가을 곡식, 카우던 가축을 두고 갈 수 없어 이주하지 못한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했다.

또 집이란 집을 모조리 불 지르고 외양간에 메어놓은 소들은 발버둥치다 죽어갔다. 대나무 밭으로 옮겨붙은 불길은 따닥!띠닥! 폭죽 소리를 내면서 붉은 노을로 변해갔다. 해안마을로 소개된 주민들 중에 가족 중에 행방을 모르는 기족이 있으면 도피자의 가족이라고 해서 사살했다.

군은 1948년 12월 29일 대전에 주둔했던 제2연대를 제주로 불러들여 제9연대와 지휘권을 교체시켰다. 새로 부인한 제2연대장 함병선 역시도 일본군 지원병 출신으로 만주에서 독립군을 상대로 전투 경험을 쌓은 일본군 준위 출신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렇게 악명높은 전투를 경험한 일본군 출신들을 신뢰했다. 제2연대장 함병선 중령은 여수 순천 반란사건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이다.
함병선이 지휘하는 제2연대는 1948년 가을부터 1949년 3월까지 한라산에 초목이 시들어가는 계절을 이용해 대대적인 토벌을 감행했다. 산간마을에서 잡혀오거나 소개되어 내려온 사람들로 경찰서 유치장은 넘쳐났다. 군부대가 주둔했던 제주 농업학교에는 임시로 천막수용 시설을 설치했다. 제주시내의 마을 공용창고도 임시수용소로 변해갔다.

그 당시 제주 도내에서 가장 큰 고구마 주정공장인 건입동 주정공장 창고에는 2천 명이 넘는 주민들이 남,여,노,소 구분없이 갇혔다. 그래도 수용소가 모자라서 서귀포 경찰서로 인계해 각 지역에 있는 고구마 전분 공장 창고들을 모두 유치장으로 사용했다.
건입동 주정공장 수용소에는 경찰이 입주해 주민들을 혹독하게 취조했다. 고문을 견디다 못해 죽어나는 시신들은 날마다 들것에 실려났다. 형장으로 실려나가는 사람들 중에는 서부두에서 배에 실려나가 손발이 묶인 채로 몸에 돌을 매달아 바다에 던지기도 했다.
그 시신들 중에는 훗날 돌덩이가 떨어지고 나서 별도봉 앞바당에 떠올랐다는 중언들도 나온다.
이렇게 날마다 고문을 당하던 주민들은 제주 공항 근처에 있는 도령마을에서 집단사살하기도 했다. 여기가 제주공항에서 신제주 방면으로 나가는 곳 오른쪽의 소나무 밭이다.
언제가 방송뉴스에서 접했던 구제역 병에 걸린 닭이나 돼지를 집단 살처분해 묻어버린 것과 같은 모습으로 암매장한 것이다.

 

↑↑ 제주시 건입동 주정공장 옛터 , 사진 안내판에 일제시대 사진이 박혀있다.
[사진= 송기남 논설위원]


건입동 주정공장 소용소에는 고문과 고통의 아우성 속에 처절했던 한 가족의 이야기가 있다. 그곳이 제주시 연미마을이다. 이곳 송씨 집안에는 신혼부부가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토벌군이 마을로 들어가 청년들을 의심하고 문초하는 바람에 마을 청년들은 대부분 산속이나 토굴로 숨었다.
신혼부부였던 송씨 집안 며느리는 들이닥친 경찰이 남편이 어디에 숨었느냐? 시아버지에게도 아들이 어디에 숨었느냐? 며 온 가족을 문초하다가 마을 주민들을 건입동 주정공장 고구마 창고에 끌고가서 수용했다. 고문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그 고문을 당하던 새색시는 만삭의 임신부였다.
고문 경찰들은 임신부를 천정을 향해 눕혀놓은 채 통나무 날판문짝을 배위에 가로로 걸쳐놓고 양쪽에 경찰 한명씩을 올라서게 한 후 널뛰기 고문을 자행했다.

 

↑↑ 4․3 때 포승줄에 묶여 끌려갔던 사람들을 조형물로 세웠다.
[사진 = 송기남 논설위원]


차라리 죽임보다 더 지독한 천인공노할 고문 때문에 수용소의 주민들은 웅성거린다. “저 만삭의 임신부는 이제 저렇게 죽는구나!”
이렇게 고문 끝에 기절하면 바가지로 물을 부어서 깨워놓고 다시 고문하고, 그렇게 몇 번을 저승과 이승을 해대던 끝에 그곳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리고 모두가 아기가 사산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으나 천운인지, 불행인지 아기는 살아있었다.
지독한 고문과 고통으로 젖이 말라버린 아기엄마를 대신해 죽음을 기다리는 수용소의 주민들은 서로 젖을 한 모금씩 먹여 살려낸 유복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고향집이 어디냐고 누가 묻는다면 내 고향집은 제주시 오라동 연미마을이 아니라 나의 어머니가 수용돼 고문당하며 나를 낳았던 저기 건입동 주정공장 그 수용소라고...”

 


↑↑ 최근에 전시관을 지어서 마무리 공사가 진행 중이다.
[사진 = 송기남 논설위원]


[필자 약력]
송기남
제주 서귀포시 중문동
전 제민일보 서귀포 지국장 역임
전 조천읍 농민회 회장 역임
현 제주 새별문학회 회원
(사) 곶자왈 사람 회원
현제 제주 생태, 역사문화 해설사로 활동 중
제주 사삼 김창수 선생 기념사업회 준비위원장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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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114dd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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