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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아하! 마냥 울고만 싶다` / 한국 현대사의 비극 제주 4•3 민주 항쟁 (1)
송기남 K 문화타임즈 논설위원
제주 4•3 김창수 선생 기념사업회 주관 (회장 김경홍)
2022년 04월 11일 [K문화타임즈]

↑↑ 송기남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 [사진 제공 = 필자]
송기남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이 한국 현대사의 비극 제주 사삼 민주 항쟁을 6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


지금으로부터 74년전 제 2차 세계 대전이후 대량 살상의 비극은 동아시아 제주에서 일어난다. 미,일 전쟁에 패한 일본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으러 온 미국은 한국 땅에 눌러앉게 된다. 이역만리에서 조국해방을 위해 싸우던 애국지사들이 고향땅으로 돌아오고, 일본군에 징용으로 끌려나갔던 청년들과 광부들이 해방조국의 그리운 품안으로 속속 귀환한다.

삼천리 삼천만 우리 동포 돌아와 빼앗긴 민족의 혼 살려야 한다고 결의한 ‘건국 준비위원회’, 그 건국 준비위원회는 새 나라를 세우는 데 반민족 행위자가 아니면 누구나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놓고 인민 위원회로 개칭한다. 동학 사상에 이념을 뼈대로 하는 건국 5칙으로 모두가 차별없이 살아갈 나라를 세우고자 애쓴 흔적들이 건국 5칙에 담아낸다.

◇건국 5칙

하나 - 자본가와 노동자가 다 같이 잘사는 나라를 세우자/
하나 - 지주와 농민이 대등하게 잘사는 나라를 세우자/
하나 - 여자의 권리가 남자와 대등하게 되는 나라를 세우자/
하나 - 청년의 힘으로 움직이는 나라를 세우자/
하나 - 학생이 안심하고 자유롭게 공부할 수 있는 나라를 세우자/

이상과 같이 건국 5칙에는 지금도 우리에게 꼭 필요한 평등 평화와 높은 민주주의 이념을 압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것은 세계 선진 문명국에서도 명문 헌법으로서 모범이 될 만한 최상의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제주 인민위원회는 해방과 함께 1945년 가을부터 1946년 가을까지 1년 간에 학교 없는 마을에 학교를 세우고 문맹 퇴치와 함께 새나라 건설에 인재 육성을 위해 일사분란하게 행동과 실천으로 나아가게 된다.
각 마을마다 학교를 세우는 데 능력에 따라 땅을 무상으로 내놓거나 보리쌀 좁쌀 한말씩이라도 십시일반 내면서 인재육성에 함께 동참한다.

각 마을마다 청년들을 조직하여 파손된 도로를 복구하고 치안 유지에도 적극적이니 이때까지만 해도 미군정청에서는 치안유지를 위해 3대 기관으로서 인민위원회를 인정하게 된다. 그 당시 미군정청에서 3대 기관장에게 보내는 공문서에도 첫번째가 제주 도지사 ㅇㅇㅇ 귀하" 두번째가 제주도 인민위원회 위원장 ㅇㅇㅇ 귀하" 맨 마지막 세번째가 제주도 경찰국장 ㅇㅇㅇ 귀하" 였다. 여기서 도지사와 경찰국장은 미군정에서 임명한 기관장이고 인민위원회 위원장은
제주도 인민위원회가 선출한 자치 조직이다.
미군정에서 인민위원회를 3대 기관 서열 2순위에 둔 것은 지금으로 같으면 도의회 의장격으로 제주도민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그 위상이 대단했던 것이다.

‘인민위원회와 미 군정의 대립’
당시만 해도 제주 사회에서는 미군정이 잠시 머물다가 떠날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과 한국을 미국의 식민지로 지배할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로 다양하게 정세를 바라보다가 미군정이 친일 경찰들을 대거 등용하는 것을 보면서 식자층 사이에서는 전세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게 된다.
해방의 공간에서 잠시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눈치를 보던 친일파들은 미군정의 배경을 믿고 차츰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다. 한적한 길에서 인민위원회 소속의 청년들을 테러하기까지 했다. 미군정 경찰에서는 이들을 무혐의로 훈방하는 일이 잦아진다.

1947년 제 28주년 3•1절 제주 북초등학교 기념행사에는 제주도민 10분의 1인 3만여 명이 운집해 오전 기념행사와 문예행사를 마치고 바로 학교 앞 관덕정 광장으로 나오면서 해산하게 된다. 이때 일제에 경찰로 부역했던 기마경찰이 말을 타고 군중들의 틈을 지나간다. 이 때 철모르는 여섯 살 어린이가 튀어나오다가 말발굽에 치여 넘어진다. 그러나 경찰은 쓰러진 아이를 그냥두고 사라져버린다.
이 모습을 지켜본 도민들이 도망가는 경찰을 잡아달라고 소리치며 관덕정 바로 옆 경찰서로 몰려간다. 경찰은 책임자 처벌과 사과를 요구하는 주민들에게 망루에 올라서서 사격을 한다. 이날 경찰의 발표 사건으로 어린 학생을 포함한 6명이 총탄에 숨지고 8명이 중경상을 입는다.이날 이후로 미군정과 경찰에서는 사과나 보상을 하지 않고 오히려 3•1절 행사에 참가했던 청년들을 잡아가두기 시작한다.

탄압하면 항쟁이다!
분노한 제주도민들은 제주 도청을 비롯해 전체 166개 직장과 사업장에서 3월 10일 총파업을 결의한다. 이때부터 전도에 걸쳐 대대적인 검거령이 내려지고 한해 동안에 2,500명 이상이 구속된다.
모슬포 경찰서에 잡혀갔던 양은하 씨는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가가 사망한다. 신혼 초기의 젊은 부인이 남편을 살려내라고 향의했다가 죽임을 당하고, 양은하 씨의 형제들도 형제를 살려내라고 항의했다가 처형을 당한다.
제주 조천지서에서는 조천중학원 김용철 학생이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다가 절명한다. 경찰서 유치장이 모자라도 검거 열풍은 계속된다.
고구마를 쟁여놓던 전분공장 창고까지 모두 유치장으로 변해간다. 더불 침대 하나 면적에 25명에서 35명씩 채워넣으니 빽빽하게 서 있어야만 했다. 24시간 서 있을 수 밖에 없어 몇 사람씩 번갈아가며 무릎을 꿇어앉아 쉬는 것을 반복적으로 하는 옥살이를 견뎌내야 했다.
지난 1년 만에 제주도민들이 미군정과 친일파였던 경찰에게 당해온 차별과 황포에 분노와 저항으로 도민들은 맞선다.

한라산에 봉화가 오르거든!
1948년 4월 3일 새벽 봉기를 알리는 봉화가 한라산에 오른다.
이 시간 전에 전 인민이여 들고 일어나라!
이 사건이 제주에서 있었던 제주 4•3 사건이다. 이렇게 4•3은 발발하고 형제끼리 피 흘리는 싸움을 우려한 제주 9연대장 김익열과 제주 인민유격대 사령관 김달삼(본명 이승진)과 4월 28일 4•28 평화 협정을 체결한다.
3일 간의 시간을 두고 한라산에 흩어져있는 인민유격대에 서로 연락이 되는대로 싸움을 중단하게 해야 한다는 협정이었다. 그러나 이틀 만에 경찰은 오후 2시 대낮에 서북청년단을 제주읍 오라리 마을에 몰려가 인민유격대로 가장해 불을 지르게 하고, 그 모습을 미군은 하늘에서 촬영한다.
미군정 측에서는 이것을 인민유격대가 불을 놓았다고 홍보해 산에 있는 사람을 토벌할 것을 명분으로 삼게 된다. 그리고 5월 5일 경무부장 조병옥은 제주도에 와서 미군정장관 딘, 송요찬 경비대 총사령곤 등이 제주도민 30만 명을 다 죽여도 좋으니 전부 사살하라고 김익열 연대장에게 명령한다.
27세의 젊은 군인 김익열 연대장은 조병옥 경무부장에게 무고한 민간인을 무작위로 죽이는 것은 문명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로 인해 국제사회에서 인권문제로 비난받는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이냐고 강력히 항변한다.
조병옥 경무부장은 아들 뻘도 안되는 젊은 연대장이 자신의 명령을 거역하고 꼿꼿하게 대든데 대해 노발대발하여 김익열 연대장을 손가락으로 가리켜 저놈의 아비는 공단당이다라고 소리친다.
이 때 김익열 연대장은 어디서 함부로 무고한 남의 인격을 모독하느냐고 단상으로 올라가 조병옥 경무부장의 멱살을 잡고 한판 붙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익열 연대장은 직위 해제되어 육지로 소환됐다. 

<다음에 계속>


[필자 약력]
송기남

제주 서귀포시 중문동
전 제민일보 서귀포 지국장 역임
전 조천읍 농민회 회장 역임
현 제주 새별문학회 회원
(사) 곶자왈 사람 회원
현제 제주 생태, 역사문화 해설사로 활동 중

제주 사삼 김창수 선생 기념사업회 준비위원장
k문화타임즈 논설위원

김미자 cloverail@hanmail.net 기자  114dd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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